은유로서의 알, 우주를 만나다 : 작가 안기순의 “영원”

관리자
2022-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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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민동주 (미술평론가)

 


여름날 오후에 바라 본 수평선의 다양한 변화를 떠올리게 하는 색들의 조화와 채운 듯 쉬어가는 여백들을 보고 있노라면,

잔잔한 화음이 잘 어우러진 섬세한 음악을 듣고 있는 듯하다. 흐트러짐 없이 질서정연하며 고급스런 색깔의 조화가 빚어내는

아름다운 화음을 듣노라면 수평선 저 너머의 심연이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작가 안기순의 작품은 감각적이면서 동시에 관념적이다.

대학에서 한국화와 서양화를 전공하고 대학 졸업이후 오랜 시간 디자인 분야에서 많은 활약을 해 온 작가는

 컴퓨터 그래픽이라는 매체를 이용하여 작업하지만, 그가 사용하는 색과 여백 속에는 한국화와 서양화,

그리고 디자인의 요소들이 골고루 들어있다. 작가가 그 동안 작업해 온 나무나 알, 그리고,

대지나 우주는 활기가 살아있는 생동감 넘치는 색으로 생명력과 연속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영원에 대한 갈망을 표현한다.

작가는 지난 수년간 알을 주 소재로 작업해오고 있다.


알은 균형과 생명력의 상징이다. 시작을 의미하기도 하고, 끊임없는 순환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역사를 뜻하기도 한다.

개개의 알에서 시작된 생명은 부화되어 현재를 누리다가 사라지지만 알은

다시 생겨나 끝없이 이어가는 연속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알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는 역사를 갖는 존재이다. 알은 이렇듯

일회성과 영원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개체로서의 알은 “충만”한 소우주이며 알 껍질을 경계로 대우주와 분리된다.

알의 소우주는 알을 깨고 나옴으로써 대우주와 만나게 된다.

또한, 연속성을 지닌 역사적 존재로서의 알은 그 자체가 대우주이다.

안기순 작가의 알은 “비상”(부화)을 통해 은유로 대우주와 만나고,

개체가 전체를, 과거가 미래를 만나며 이 겹쳐진 (overlapping) 만남을 통해 “영원으로부터 생명력”을 얻는다.

따라서, 단순화된 알의 형상은 실제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관념화된 알이다.

 

하나의 개체의 상징인 소우주 알과 알 바깥의 세상인 대우주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안기순의 작품에서 알이

처음으로 등장한 “앤디 워홀에 의한 (By Andy Warhol)”이라는 작품을 먼저 들여다보아야 한다.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연작을 차용, 먼로의 얼굴 부분을 알로 대체하는 부분 변형을 가한 작품이다.

 팝아트로 일컬어지는 앤디 워홀의 작품은 대중문화의 아이콘이나 대량으로 생산되고 소비되는 사물을 대상으로

삼아 고급 미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결과를 가져왔다.

안기순 작가의 알 또한 그런 앤디 워홀의 작품이 지닌 아우라를 바탕으로  평범한 알이 예술적 지위로

상승되는 효과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즉, 마릴린 먼로라는 한시적인 아름다움의 상징,

그리고 그보다 더 한시적인 관능을 알을 통해 소우주와 대우주가 만나고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며,

개체와 전체가 하나가 되는 관념으로 승화시켰다. 이후 안기순의 작품에서 알은 생명력을 지닌 영원함의

상징으로 거듭 등장하게 된다.

 

 

알을 소재로 한 이번 전시의 주제는 영원성이고, 알의 의미 변화에 따라 세 개의 소주제로 나뉜다:

“영원으로부터 온 생명력”, “충만”, 그리고 “비상.”

 

 

1. <영원으로부터 온 생명력> - 알과 우주의 유비(analogy): 하얀 알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주에 떠 있다(작가).”

 

우주는 넓고 깊어서 낯선 미지의 공간이다. 여름날 오후의 수평선의 다양한 모습처럼

보이는 안기순의 우주는 혼돈 상태를 벗어나 거대한 운행질서를 따르는 우주이다.

알 속에 우주가 투영된 듯 우주의 빛을 담아내고 있다.

혹은, 반투명한 알 뒤로 우주가 엷게 은은하게 비친다. 알과 마찬가지로 우주는 실제 우주를 연상케 하지만

우리 상상 또는 관념 속의 우주를 형상화하고 있다. 시원을 알 수 없으며 영원성의 상징이기도 한

우주는 우리의 정신적 우주와 서로 맞닿아 있다. 알과 우주는 영원성이라는 지평위에

팽팽한 긴장과 이완의 관계 속에 아름다운 빛을 발산하고 또 수렴하고 있다.

알 속의 소우주와 영원의 대우주는 절묘한 공간 구도와 여백의 활용으로

꽉 찬 듯하면서 비어 있고 비어 있는 듯하면서 꽉 차 있는 “충만”감을 준다. 대우주가  소우주 알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은

알이 영원으로서의 대우주를 닮아가는 것이며

대우주의 겸허한 일부인 소우주가 대우주이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이렇게 안기순의 작품에서 알과 우주가 만나는 지점은 바로 과거와 미래 양쪽의 영원을

동시에 바라(보)는 마음가짐이다.

영원(eternity)은 앞을 향해 즉, 미래를 바라보고 나아가며 염원하는 관념이다. 그러나 안기순의 작품은

역으로 영원으로 부터(“from eternity”) 생명력을 얻는다.

비상의 흔적을 뒤로 하고, 앞으로 전진하는 생명력 넘치는 알을 보기 바란다.

 

 

2. <충만> - 창 또는 틀로서의 알:

 

하얀 바탕 위에 한 쪽으로 기울어졌으나 지나치지 않은 알의 절묘한 균형감은 생동감과 안정감을 동시에 준다.

한 알 속에는 움직이는 우주가, 다른 알 속에는 정지한 우주가 있다. 한 알 속에는 현란한 우주가,

다른 알 속에는 정제된 우주가 있다. 알은 모두 “충만”하다. 어떤 알은 불투명하며 어떤 알은 투명하다.

안기순의 투명한 빛을 칠한 듯한 색감과, 안정과 불안정을 수렴하는 아슬아슬한 구도의 절묘함이 충만함을 강조한다.

 알 속에서 아름다운 우주의 빛이 차오르고 있다. 알 바깥의 대우주가 알 속으로 들어와 있다.

알이라는 소우주가 대우주를 담고 있고 대우주가 소우주 안에서 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알은 대우주를 들여다보는 창이 된다.

 알은 우주를 보는 창이며 봄으로써 우주를 담는 틀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알은 영원을 보는 창이며 틀이다.

알을 통해 본 대우주는 곡선으로 운행 중의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있고 수평선으로 정지되어 보이는 것도 있다.

거시적 관점과 미시적 관점, 그리고 동적 관점과 정적 관점을 동시에 다루고 있다. 닮은꼴인 부분이 전체를 담고 있다.

알 속에서 나오는 희미하고 은은한 빛은 혼돈의 상태에서 우주의 질서로 이행하여 빛이 생겨나는 우주 시원의 순간을 이르는가,

우주가 사라져 가며 타오르는 마지막 빛을 이르는가. 대우주는 소우주 안에서  사라지지만 새로이 다시 시작한다.

알 속에 막 나타나기 시작한 빛은 우주 공간에서의 생명의 탄생과 개체로서의 알의 생성의 순간을 보여주며,

반복 순환되는 새로운 시작은, 생명의 순환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영원은 오래된 것의 축적이나 집합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부정이며 동시에 자기혁신인 것이다.

 

 

3. <비상> - 흔적:

 

알의 외양은 매우 정적이다. 그러나 알의 내부는 생명을 태동시키는 에너지를 가질 만큼 매우 역동적이다.

 “비상”의 알의 모습은 전체가 드러나지 않고 화면을 벗어나고 우리의 시야를 벗어나 있다.

알은 정지한 듯하면서도 역동하며 머무르지 않고 흔적으로 존재한다. 알의 선명한 경계선이 사라지고

윤곽선이 흐릿한 흔적을 남긴다. 알은 사라지거나, 화면 너머에 존재함으로써 알의 부재를 보여준다.

생명력은 한 편으로는 “비상”을 통해 흔적을 남기며 사라짐으로써 역사가 되지만, 영원의 눈으로 본

생명력은 사라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힘차게 되돌아온다.

작가 안기순의 작품은, 알과 우주가 서로의 존재감을 대비 속에서 극대화시키며 알은 실존하는

어떤 알보다도 완벽한 조형미를, 우주는 일련의 중간색으로 표현되었으나,

그 중간색들이 발광체처럼 빛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알과 우주로 단순화된 데서 오는 정제된 느낌,

그리고 결코 가볍지 않은 색의 조화는 지고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관념화된 알과 우주의 모방과 상상이 제공하는 경이로운 아름다움 앞에 넋을 잃고 영원을 경험하게 되는 찰나,

초점은 사라지고 대상과 관람자가 하나가 되는 선(Zen)의 세계를 경험하게 될 수 있다.

 

이는 그의 알을 주소재로 다루지 않은 다른 작품들에서도 나타난다.

 <Hymn of Life> 연작의 소나무, 그리고 <향수> 연작의 고가구와 나무에서도 생명력과 생명의

연속성을 주요 화두로 삼고 있다. <Hymn of Life> 연작에서 소나무가 주위 환경에 의해 변형된 형태가 아니고,

흔들림 없이 생동감이 넘치는 관념 속의 나무를 형상화 한 것으로 보면 작가의 시선이 어느 곳을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개개의 생명체는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거대 우주의 질서 있는 운행의 일부로서의 생명체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는다.

 

<향수> 연작 역시 고가구 프레임과 그 뒤에 비치는 나무를 통해 생명의 연속성을 역설한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Hymn of Life> 연작과는 다르게 고가구의 흔적을 이용함으로써

<비상>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변화에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작가의 개인 사무실에 놓여 있던 고가구의 사진을

이용해 만든 고가구 프레임을 활용한 <향수> 연작은 프레임 뒤에 비친 나무들과 더불어

“현재는 과거의 결과물이며 과거와 현재의 단절은 있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작가).” 그러므로 현재는

과거라는 프레임을 통해 볼 수 밖에 없으며 “과거는 현재를 열어주는 문이다(작가).”

 

더 나아가, 작가의 고가구는 과거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현재 사용 중인 사물이기도 하다.

현재로 대표되는 나무를 고가구와의 시간관계 속에서 과거에 대비되는 현재로 볼 수도 있고 현재에 대비되는

미래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고가구의 현재는 과거를 담고 있듯이 나무의 미래 또한 과거와 현재를

 모두 담고 있을 것이며, 그로써 영원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향수> 연작에서 희뿌옇게 나무를 가리고 있는 고가구 프레임은 우리의 전통 고가구에

고유한 경첩과 열쇠 구멍을 포함하고 있다. 고가구 너머의 나무를 흐릿하게나마 투과시켜

관람자가 식별할 수 있게 한 프레임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경첩과 열쇠 구멍은 투시를 방해하기도 한다.

프레임의 한가운데 위치한 열쇠 구멍은 들여다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고가구 프레임 뒤의 나무도

고가구 속안도 명확하게 볼 수 없게 하면서 눈의 초점을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이곳에 집중시킴으로써

 프레임 뒤의 나무를 주변부로 밀어내고 있다. 반투명한 프레임은 현재를 보는 문일 수도 있지만,

굴절된 시야를 의미할 수도 있고, 경첩과 열쇠 구멍의 존재는 고가구 프레임이

현재를 여는 문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데 있어서의 한계를 의미할 수도 있다. 고가구로 대표되는

과거는 개개인의 과거라기보다는 오랜 시간을 담고 있는 역사를 가리킨다. 그것은 문명화된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을 규정하는 문화나 관습, 선입관 등을 의미할 수 있다.

고가구의 단단한 듯 보이는 경첩은 그것들의 억압이나 구속, 또는 금기 등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으로 읽힐 수도 있다. 프레임이 이렇게 막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알을 소재로 한 이번 전시의 세 개의 소주제

 “충만”, “영원으로부터 온 생명력”, 그리고 “비상”과 무관하지 않다.

 즉, “충만”했던 시간으로의 회귀 열망을 “비상”을 통해 “영원”하게 만들고자 하는 작가의

염원이 과거에서 현재를 지나 미래로까지 연결되는 것이라고 본다. 이로써 안기순의 세계는 좀 더 분명해진다.

 

영원한 존재에 대한 갈망.

안기순은 영원한 존재에 대한 갈망을 방황하며 찾지 않는다.

조망하듯 침잠하듯 명상하듯,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는 답을 묻고 물으며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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